쌍방울 레이더스
[clearfix]
1. 개요
1991년부터 1999년까지 한국프로야구에 참가한 대한민국의 프로야구단. 프로야구 원년 6팀 이후에 창단된 2번째 신생팀으로, 8구단 시대를 연 팀이다. 홈 구장은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이었으며 제2홈구장은 군산시 사정동에 있는 월명 야구장이었다. 팀의 상징색은 노란색.'''"내가 소싯적에 쌍방울이란 팀이 있었는데 말야..."'''
'''"정말 그런 팀이 있었어요?! 설마 팀 이름을 그렇게...?"'''
연고지는 전라북도 전주시. 구단이 존재할 당시만 하더라도 KBO 리그의 연고지 운영 방식은 '''광역연고제'''였다. 특정 도시로 연고지를 국한하는 '도시연고제'로 바뀐 것은 쌍방울이 해체된 후인 2000년부터다. 따라서 전주시로 연고 권역이 국한됐다기보다는 전라북도 전역이 레이더스의 연고 권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군산에서 홈 경기를 나눠 치른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가 열리는 전주시와 군산시 이외 지역에서는 공기 취급 받았다. 그나마 익산시, 부안군, 김제시 등 전라북도 북부권은 군산 시리즈 때문에 나름 팬들이 몰리기라도 했지만 남부권인 고창군, 정읍시, 남원시 등 해태 타이거즈에 가까운 지역일수록 영향력이 약했다. 더구나 무진장으로 일컬어지는 전북 동부권은 여러 영향으로 더더욱 영향력이 약했다.
어쨌든 전주시민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의 여파로 빠르게 쇠락하면서 손 쓸 새 없이 해체된 비운의 팀이기도 하다.
2. 역사
2.1. 창단
1985년 빙그레 이글스가 7구단 시대를 열자, 한국야구위원회는 일정의 불균형 등을 개선하기 위해 제8구단 창단을 추진했다. 이 때 입찰에 참여한 기업은 마산시를 중심으로 한 한일합섬[7] 과 전주시를 중심으로 한 미원[8] -쌍방울[9] 컨소시엄. 일반 여론은 영남 지방에 남북으로 2개 팀이 있기 때문에 전북에 8구단을 창단하는 것이 좋겠다는 여론이 높았다.
그런데 전라북도에 제 8 구단을 창단하겠다는 KBO의 계획이 알려지자 전라도 지역 연고팀이었던 해태 타이거즈 구단은 물론 호남 야구팬들이 격렬히 반발하며 들고 일어났다.[10] 호남 지역민들은 쌍방울의 제 8 구단 계획은 '''영남 정권의 음모'''가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11] 해태가 왕좌의 자리를 지키며 호남 사람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자 이를 꼴사납게 여긴 영남 정권이 전라북도에 신생 구단을 창단하여 '''호남을 남북으로 분열'''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12] 이에 해태 타이거즈와 호남 지역팬들은 신생구단 반대 서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호남 지역 여론이 들끓자 정치권에서도 제8구단 창단 반대에 발벗고 나서기 시작했다. 정치권으로부터 신생 구단 창단을 중단하라는 압력이 KBO에 이어졌다.
제8구단 창단을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이용일[13] 당시 KBO 사무총장은 호남 지역민들의 극심한 반대로 쌍방울 창단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자 호남 지역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차지하던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에게 직접 읍소했다. 이에 김대중 총재는 '''신생 팀을 전라북도에 유치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러자 해태 구단과 호남 사람들의 반대는 급속도로 수그러들었다. 이후 제 8 구단의 창단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여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 결국 미원-쌍방울 컨소시엄이 제 8 구단 창단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쌍방울이 미원과 일방적인 결별을 선언하며 쌍방울 단독으로 제 8 구단을 창단하게 된다. 훗날 밝혀진 얘기이지만 전주중-전주고 출신으로 야빠였던 이의철[14] 당시 쌍방울 사장이 야구단을 창단하고 싶지만 자본금 50억 원이 되지 않는 회사의 사정 때문에 미원의 이름을 팔아서 창단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광역연고제였기 때문에, 전라도 연고를 가지고 있는 해태 타이거즈에 연고지 분할 배상금 10억원을 지불하고 전라북도 연고를 구입하였다.
2.2. 1990~1995시즌
마침내 1990년 '''쌍방울 레이더스'''라는 이름으로 정식으로 창단된다. 창단 감독은 김인식. 1990시즌 1년 간은 2군 리그에 참여한 뒤, 1991년 4월 5일 빙그레전에서 본격적으로 1군 무대에 첫 선을 보였다. 이 경기에서 11-0으로 대승을 거뒀는데 당시 개막전 최다 점수차 완봉승이었다.[16]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 홈 개막전은 그 해 4월 9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사라진 팀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점인 '모기업이 약하다'는 부분이 불안을 자극하였고 이 부분은 뒤에 "빤쓰팔아 팀 운영한다"는 농담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연고지 측면에서도 전라북도 관내에 야구부가 있는 고등학교가 전주고등학교, 군산상고 2개뿐[17] 으로, 군산상고가 아무리 야구 명문이라 해도 연고지 선수만으로는 야구 팀 운영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다 보니 전술한 대로 KBO에서 해태 타이거즈의 전력 약화를 기대하며 창단하게 했다는 루머도 나돌았다[18] . 쌍방울 구단 이사였던 공천섭이 민주정의당 재정위원 겸 지구당위원장이기도 해서 당시 민주당은 쌍방울의 창단을 호남 민심 회유용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게다가 1군 리그 참가 1년을 앞두고 1990년 6월 21일 2군 선수단 버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운전기사와 트레이너가 사망'''하고 '''선수 전원이 부상'''을 당하는 사고까지 발생[19] 했으며 1991년 9월 17일에는 임신근 수석코치가 심장마비로 타계하기까지 한다.... 어찌 보면 앞으로 팀의 안습한 운명을 예감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결국 선수진이 약한 상태에서, 1991년 이후 신인 선수 지명도 거듭되는 실패를 거듭하게 된다. 이미 1991년 말 드래프트부터 그 조짐이 있었다. 이 당시 쌍방울 1차 지명 선수가 방극천으로, 타 팀 지명자들의 네임밸류에 비해 많이 부족했다. 현장 분위기도 의외의 지명이라는 평가와 동시에 안습한 팜의 부작용이 나타났다고 봤고...[20] 심지어 '''양준혁'''이 신인 지명에서 쌍방울에 2차 1순위로 임창식과 함께 낙점되자, 상무를 간 뒤 삼성 라이온즈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군 생활을 하다가 기어이 삼성에 1차 지명을 받아 탈주한다. 결국 다른 팀에서 방출된 한물간 선수들로 팀을 운영하는 상황이 되었다. 예를 들어 왕년의 해태 타이거즈 우승 포수였던 '''장채근''', 해결사 '''한대화''', 독일병정 '''박노준''', 독종''' 김광림''', 2루수 최초 홈런왕 '''김성래''', 학다리 '''신경식''' 등이 여기에서 은퇴하거나 다시 한 번 부활하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발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1991년 1군 첫 시즌에서 예상을 깨고 승률 4할 이상(.425)을 기록하는 호성적을 기록하며 OB 베어스를 제치고 LG 트윈스와 공동 6위를 차지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조규제는 방어율 2위에 구원왕, 김기태는 홈런과 타점 2위를 기록하며 신인왕은 쌍방울 집안싸움이었고 결국 신인왕은 조규제가 가져갔다. 이 때의 기록은 역대 창단 팀이 1군 진입 첫 해에 기록한 최고 승률로 아직도 남아있다. 하지만 1992년에는 주력 선수들이 부상과 군대 문제로 전력에서 이탈하며 최하위로 추락했다. 31홈런을 친 김기태가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시즌이 끝나고 성적 부진에 따른 책임을 물어 김인식 감독이 물러나고 신용균 태평양 돌핀스 투수 코치가 사령탑에 올랐다. 그러나 감독 한 명이 바뀐다고 성적이 오를 일은 그리 많지 않은 법. 1993년도 삼성과 치른 개막전에서 0대 17로 참패하는 등 시즌 7위에 머물렀고 신용균 감독은 1시즌 만에 사퇴했다. 빈약한 구단의 재정 상황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1군 진입 원년 이후로는 되려 꼴찌로 떨어진 뒤로는 꼴찌이거나 간신히 꼴찌를 면하는 성적이었다. 1994년에는 김기태가 25홈런을 기록하며 '''왼손 타자로는 최초로 홈런왕'''에 올랐고, 1995년에는 시즌 개막 4연승을 달리며 기대를 모으지만 갑작스러운 12연패 끝에 꼴찌로 추락해 버리는 아픔을 겪는다. OB에서 이적한 김광림이 타율 1위(0.337)를 차지한 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단 이후 '''68788'''이라는 비밀번호를 신나게 찍는 만년 꼴찌팀.
여기에는 팀 특유의 암울한 분위기도 한몫했다. 8구단 드립은 핑계고 사실 '''해태 타이거즈'''의 기반을 약화시키려고 만든거 아니냐부터 주변에 해태 팬들 많으니까 이 팀은 해태 2중대가 딱 어울린다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나돌았고, 실제로 이 기간동안 전주에서의 인기는 해태보다 낮았다. 이런 상황에서 퇴출당한 선수들이 모인 구단인 만큼 처음 쌍방울에 자의건 타의건 입단하게 된 선수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팬들부터 선수들까지 광범위하게 패배주의가 만연해 있던 팀. 암담한 분위기 속에서도 김원형이 1993년 4월 30일 OB를 맞아 단 한개의 볼넷만을 허용하는 완벽한 투구로 역대 7번째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유일하게 볼넷을 얻은 OB 김민호도 2루 도루를 시도하다 아웃되어 이날 OB 선수 가운데 2루를 밟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투구 수 96개 탈삼진 6개 내야 땅볼 12개 내야플라이 3개 외야플라이 5개였다.
2.3. 1996~1997시즌
그동안 야구단을 방치해왔던 쌍방울 그룹은 1995년 시즌 종료 후 드디어 야구단에 본격적인 투자를 결심했다. 우선 김성근을 신임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전년도보다 네 배나 많은 15억을 스카우트 자금으로 배정'''하는 등 파격적인 지원을 해줬다. 대대적인 선수단 충원으로 1997년 쌍방울은 전체 8개 구단 중 '''연봉 총액 1위'''를 기록했다.[21]
사실 김성근이 감독으로 부임하기 전에도 쌍방울의 전력은 그렇게 나쁜 편이 아니었다. 투수력은 하위권이었지만 타격은 중상위권의 전력을 가진 팀이었다. 타격 지표들을 보면 1995년 팀 타율, 팀 홈런이 모두 4위를 기록하고 있다. 전력에 비해 팀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은 투수 문제도 있었겠지만 현장 코칭스태프의 능력 부족에 기인한 바가 컸음을 암시한다.
우선 1996년 김성근 감독의 목표는 최소 60승이었다. 60승은 전년도 5위 삼성이 기록한 승수. 일단은 만년 하위팀으로 패배의식에 찌든 선수단에게 승리의 기쁨을 알려주기 위해 일차적으로 중위권 도약을 목표로 한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이 때는 FA나 2차 드래프트처럼 외부에서 전력 보강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고,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혹독한 훈련으로 전력 향상을 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하면 미친 짓이라고 욕먹지만 1990년대 프로야구는 이런 방법이 아직까지 먹혔던 시대다.[22] 쌍방울의 중심 타자 중 한 명이었던 심성보는 '''"상상도 못할 훈련이 계속됐다. 타자들은 손바닥이 찢어져 스윙할 수 없는데도 감독님 앞에서 다시 수천 번씩 배트를 휘둘렀다. 내야뿐 아니라 외야 펑고도 하루 1천개 이상씩 받았다. 오죽 힘들었으면 휴식일에도 어디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금만 무리하게 놀아도 다음날 몸이 얼마나 힘들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겨우내 흘린 구슬땀은 시즌 성적으로 나타났다. 4월 9승 5패, 5월 10승 12패로 5할 싸움을 했다. 6월 초반 10경기에서는 2승 8패로 부진했지만, 이후로는 '''8연승'''을 하면서 진짜로 올해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했다. 7월에는 9승 9패로 잠시 숨을 골랐고, 8월에는 6월과 마찬가지로 초반에는 3승 6패로 부진했지만 14일부터 28일까지 무려 '''13연승'''을 거두면서 치고 올라갔다. 당초 목표였던 60승은 8월 30일에 이미 거두었으며 그 이후로도 9월에 9승을 보태면서 김성근 감독의 부임과 함께 구단의 적극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1996년 0.563의 승률로 해태의 뒤를 이어 페넌트레이스 2위를 차지하며 포스트시즌에 당당히 진출했다. 이런 환골탈태한 쌍방울의 모습을 보고 언론과 야구팬들은 경악했다. 홈 17연승의 신화도 이 시즌에 나온 것.
김성근 감독이 약체팀을 강팀으로 변모시킬 수 있었던 것은 혹독한 훈련도 있었겠지만 선수들에게 신뢰를 불어넣어주면서 패배주의를 타파했기 때문이다. 이 기사를 보면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계속 불어넣어 주었고 마인드를 바꾸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8년 8월 OB에서 쌍방울로 트레이드 되어 김성근 야구를 경험한 박상근은[23] "매정한 분 같지만 선수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고 밝혔다. 팀에서 야쿠르트 캠프에 선수를 파견한다고 해서 감독님한테 사비라도 괜찮으니까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감독님이 왜 가려고 하느냐고 해서 "저도 나중에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일본 야구를 꼭 경험하고 싶습니다."고 했더니 아무 말 않고 명단에 이름을 올려 주셨다고 한다.
이 시즌에 돌격대의 돌풍을 주도한 것은 마운드였다. 두 자릿수 승리를 올린 선발투수는 성영재밖에 없었지만 올망졸망한 투수들을 잇달아 투입하는 인해전술식 마운드 운용이 빛을 발했다. 부상에서 돌아온 마무리 투수 조규제는 1.81의 평균자책점과 20세이브를 올리며 뒷문을 확실하게 걸어 잠갔고, 김기덕도 보직을 가리지 않고 힘을 보탰다. 그 외 삼성에서 온 김현욱과 오봉옥도 좋은 활약을 했다. 그 결과 창단 이래 5년 연속 최하위였던 팀 평균자책점이 3위(3.33), 4년 연속 최하위였던 팀 투수 총합 WAR[24] 도 4위로 로 뛰어올랐다. 공격력도 팀 홈런은 58개밖에 치지 못하면서 꼴찌를 기록했지만 팀 득점과 출루율, OPS에서 2위를 기록했다.[25]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해 현대 유니콘스를 상대로 한 플레이오프에서는 게임 스코어 2:0에서 2:3로 사상 첫 리버스 스윕으로 탈락하면서 쌍방울의 첫 포스트시즌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1997년에도 돌격대의 전진은 계속됐다. 성영재, 박성기, 오봉옥 등 부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에서도 전년도보다 1승 더 많은 71승을 거두며 정규시즌 3위에 올랐다. 투수진에서는 김현욱이 시즌 다승, 평균자책점, 승률 3개 부문에서 1위를 하면서 대활약했고[26] , 성영재. 김원형, 조규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타자들도 역시 그해 3관왕을 달성한[27] 김기태를 필두로 OPS .983을 기록한 박경완과, 3할 타율을 달성한 최태원이 전년도에 이어 활약했으며, 조원우, 심성보 등도 포텐을 터뜨렸다. 참고로 1997년에는 당해 우승팀인 해태 타이거즈와 엇비슷한 공격력을 보였으며[28] 팀 홈런, 타점, 득점은 뒤졌지만 오히려 타율, OPS는 해태를 앞지르기도 했다.[29] 이렇기 때문에 이 시즌에 대해서는 이 당시 선수들이나 많은 전문가들이 '''쌍방울이 한국시리즈에 올라갔다면 해태를 꺾고 우승했을 것이다'''란 평가도 있었다.
이 시즌에는 4월 9승 7패로 전년도와 비슷하게 시작했다. 허나 5월 11승 12패, 6월 8승 12패로 주춤했다. 7월에도 올스타전 이후 첫 시리즈에서 3연패로 시작하면서 불안했으나 월말에 5연승을 하면서 9승 1무 6패로 끝냈고, 8월 14승 9패, 9월 18승 1무 11패로 차곡차곡 승수를 쌓으면서 전년도의 성적이 플루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허나 이번에는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에게 시리즈 스코어 1:2로 탈락한다. 필승카드 김현욱이 1, 3차전에서 무너지며 패전 투수가 된 것이 뼈아팠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되었던 게, 그 해 삼성 상대로 5승 11패 2무로 크게 뒤졌다. 재미있는 점은 포스트시즌에서 쓴맛을 보여준 상대였던 현대 유니콘스와 삼성 라이온즈가 바로 이듬해인 1997년과 2년 뒤인 1998년에 박경완/조규제/김현욱/김기태로 대표되는 핵심 전력을 빼 가서 쌍방울을 몰락하게 했던 팀이라는 점.
이 팀에는 가장 심각했고, 아니 우승팀이 되기에는 부적격한 문제점이 있었는데 바로 '''선발투수'''의 부재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포스트시즌 같은 큰 경기에서는 S급 선발투수의 활약이 중요했으나 1996년도에는 10승 성영재가 전부였고, 1997년도에는 평균 5이닝은 버텼지만 9승 9패를 거둔 김원형빼고는 아예 없었다. 그 문제점은 포스트시즌에서 드러났다. 성영재는 1997년에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상대로 1승을 거두었지만 이것이 쌍방울의 포스트시즌 유일한 선발승이었다. 그렇게 1996년에는 선발이 강한 현대 유니콘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패배, 그리고 1997년에는 선발은 약하지만 타격은 넘사벽으로 강했고 무엇보다 에이스 김상엽이 있었던 삼성 라이온즈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패배했고, 쌍방울은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였다.
이 시절 김성근 감독은 상당히 변칙적인 운영을 통해 성적을 거두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전술했듯이 1996년 '''정규 리그 2위인 팀 성적에도 불구하고 10승을 넘긴 선발 투수가 단 1명에 불과했다''',[30] 1997년 '''김현욱의 구원승 20승[31] ''' 등을 들 수 있다. 사실 이런 운용이 논란은 있어도 이는 선수단의 깊이가 얇았던 팀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는 의견도 꽤 많다. 혹자는 김성근 감독의 '감독으로서의 실력'은 1121을 이룩한 SK에서보다 쌍방울에서 더 빛을 발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 하지만 이 당시 김성근 감독은 포스트시즌 징크스에 시달리는 감독이었고 아직 그걸 깨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1997년도 시즌은 쌍방울이 몰락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는데, 1997시즌의 쌍방울은 삼성, 현대를 제치고 '''팀 페이롤 1위'''팀이었으며,[32] 가난한 구단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방만한 운영은 결국 외환위기 이후 부메랑으로 돌아온다.[33]
2.4. 1998~1999시즌
[image]
1997년 준플레이오프 도중 쌍방울의 부도 소식이 들려오자 쌍방울 팬들이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시위를 하는 모습.
1998년 9월 9일 KBS1 <사람과 사람들> 방영분.
다음해는 기필코 한국시리즈에 올라가서 우승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던 1997년 말, 갑자기 IMF가 터지고, 무리하게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에 자금을 쓰게 되면서[34] 모기업이 심각한 재정난에 빠지게 되자 팀을 유지하기 위해 쌍방울은 KBO에 운영 자금 20억 원을 요청하게 된다. KBO는 구단주 회의를 통해 해당 자금을 대여해 주었지만 그것만으로 해결이 안 되자 쌍방울은 어쩔 수 없이 선수를 팔아먹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게 된다. 팀의 투타 주축이었던 김기태, 김현욱은 삼성으로, 박경완, 조규제, 김광림[35] 등은 현대로, 박성기는 롯데로, 김실은 OB로 이적하게 되며 이로 인해 팀의 중심 선수 상당수가 팀을 떠나게 된다. 이런 선수 파이어 세일은 1999년 말에 마일영 지명권까지 현대에 넘어간 이후 KBO의 쌍방울 선수 양도 자제 요청과 '''이미 팔아먹을 선수는 다 팔아먹어 버렸기에''' 중단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많은 선수들이 새로 수혈되었지만 떠난 선수들에 미치지는 못했다. 이 과정에서 선수들을 판매하면서 감독에게는 사후 통보를 했다.[36][37][38]
1998 시즌부터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었으나, 그해 쌍방울은 외국인 선수를 뽑지 않았다. 비싼 돈 주고 선수를 쓸 수 없었고, 중도 퇴출되어도 마땅히 대체 선수를 데려올 수 없었기 때문에 1998년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 때는 아예 외국인 선수를 선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9시즌에는 큰 마음 먹고 마이클 앤더슨과 제이크 비아노라는 나름 이름 있는 용병 둘을 영입했다.
1998 시즌은 최종적으로 전해보다 다소 낮은 6위(8팀 중)라는 성적을 거뒀다. 가을야구는 당연히 실패. 조규제와 김실이 트레이드되기 전까진 4위권에 잘 붙어있었지만 그들이 떠나자마자 동력을 잃어버리며 LG, 해태, OB의 반격에 의해 포스트시즌 진출권에서 이탈했다. 이해 우승팀 현대와는 수차례 충돌이 있었는데 김원형 빈볼시비와 마운드 높이 관련 시비가 있었다.
해당 다큐멘터리는 1999년 4월 22일에 KBS 2TV에서 방영되었던 "현장르포 제3지대"라는 다큐멘터리인데 위의 동영상 제목에 나와 있듯이 "9회말 투 아웃 김 감독의 선택"이라는 제목이다.[39] 1999년의 쌍방울을 잘 설명해주는 다큐멘터리. 2018년 시즌 종료 후 kt wiz에서 은퇴를 한 마지막 쌍방울 선수 이진영의 신인 시절도 잠깐 보인다. 2016 시즌 당시에는 이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 중 무려 2명이 KBO 리그 감독이 되었다. 김기태, 조원우 그리고 김성근 감독 본인. 여담으로 2018년 현재 저 셋은 모두 팀을 나락으로 보내며 평가가 안좋다.
1999년이 되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이 시절 일화 중 상당수는 나중에 김성근 개인팬들에 의해 날조된 것도 많기 때문에 가려 들어야 할 필요도 있다. 1999시즌 쌍방울이 어려웠다고 하지만 사실 이해 쌍방울 구단은 큰 맘 먹고 무려 마이클 앤더슨, 제이크 비아노를 영입하기도 했다.[40] 어쨌든 당시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겨울 전지 훈련은 홈구장 옆 비닐 하우스 안에서 난로를 때며 대신했고, 원정 경기는 당일 아침에 이동하거나 선수단의 식사는 기사식당에서 외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다른 팀 선수들이 원정경기 전날 이동[41] 하여 호텔에 묵고 호텔에서 고급 음식을 먹는 것과 비교해 비참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7개 구단은 28인승 우등 고속버스인데 쌍방울 구단만 1991년 1군 진입 초기부터 해체 직전까지 유일하게 45인승 일반 고속버스[42] 로 이동하여 원정 경기를 갔다.[43] 이진영을 제외한 1999년도 드래프트에 지명된 고졸 선수들을 모두 대학으로 보내야 했다.[44]
그나마 시즌 초반에는 반등의 요소가 약간이나마 있었지만 5월부터 '''주전 선수들의 줄부상'''이 이어지며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계속된 '''혹사로 인한 후유증'''이 1999년 시즌에 자비없이 나타났다. 특히 팀 내에서 타율, OPS 등 팀내 타격성적 1위를 기록하던 조원우의 시즌 아웃 부상은 뼈 아펐다. 당시 조원우는 0.314의 고감도 타율을 자랑하며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시즌 도중 외야 수비 훈련을 하던 중 김성근 특유의 강도 높은 훈련을 받다가 고무판을 잘못 밟고 미끄러져 무릎 부상을 당한 후 시즌 아웃되어 버렸다.[45] 그 외 김원형, 이동수, 김성래 주축 선수들이 하나같이 부상에 시달렸다. 한편 10년전인 1989년 태평양에서 김성근의 가혹한 혹사로 망가졌던 박정현이 1999시즌 초 예상 외로 너무 잘 던져서 10년만에 부활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박정현은 5월 중순까지 5승을 거두며 15승 페이스까지 나갔으니 언론에서는 1989년의 전성기를 보는 것 같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박정현은 친정팀 현대와의 경기에서 난타를 당하면서 페이스가 떨어지기 시작해 6월부터 시즌 끝날 때까지 1승도 못거둔채 5승 11패로 끝나고 말았다. 1999 시즌 쌍방울의 추락은 이러한 주축 선수들의 줄부상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는 것이 당시 전문가들의 지적이었다.
1999 시즌의 구단이 나름 큰 맘 먹고 영입한 외국인 선수인 마이클 앤더슨, 제이크 비아노는 김성근의 외국인 용병 잔혹사의 첫 주자들로 그야말로 다사다난하고 파란만장한 시즌을 보내야만 했다.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김성근의 외국인 길들이기의 일환으로 스프링캠프에 제외되기도 했으며, 투수 폼 교정을 두고 마찰을 빚기도 했다. 시즌 시작 후에도 2군 강등을 반복하며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들 외인 용병들은 김성근과 맞지 않은 궁합을 보이며 6점대의 저조한 방어율을 보였다. 앤더슨의 경우 전년도에 LG 트윈스에서 주로 마무리로 뛰며 20세이브를 돌파하며 그럭저럭 성적을 냈다. 그러나 쌍방울에서 초반에 호투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이 이유없이 2군 강등과 1군 복귀를 반복하자 납득할 수 없다며 훈련에 불참하며 김성근에게 항명했다. 그러자 김성근 감독은 앤더슨의 퇴출을 지시했고, 앤더슨은 구단 사장에게 이러한 상황을 항의하기도 했다. 구단의 중재로 앤더슨이 김성근 감독에게 사과하며 사태는 표면적으로 수습되었지만 이후 앤더슨의 성적은 급격히 나빠졌다.
팀은 최악의 성적을 거두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구단과 김성근 감독과의 마찰도 심화되었다. 구단 고위층은 경기 내에서의 선수 기용과 작전까지 간섭하려 들었다. 이 와중에 김성근 감독은 전무후무한 '''심판 폭행 사건'''을 일으켰고, 이에 여론이 악화되자 쌍방울 구단은 올스타전 즈음 김성근 감독을 해임시킨다.
후임으로는 김준환 당시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에 선임되어 남은 시즌 팀을 이끌었다. 후반기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 김준환 감독은 와해되어 가는 팀을 이끌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결국 쌍방울은 그 해 8월 25일부터 10월 5일까지 내리 '''17연패'''를 당하면서[46][47] '''한 시즌 최다패 기록인 97패'''(28승 7무)를[48] 와 '''0.224'''라는 기록적인 승률을 기록하면서 마지막 시즌을 마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1999시즌 김성근 감독과 후반기 김준환 감독대행은 똑같이 0.224의 승률을 기록했다. 그래도 상황이 나았던 전반기에 비하면 정말 팀이 공중분해되어가는 와중에 있었던 하반기에 팀을 이끌었던 김준환 감독대행이 김성근 감독과 같은 승률을 유지했다는 점은 어떤 면에서 대단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시즌 후 모기업이 사실상 팀 운영을 할 수 없게 되면서 KBO에 의한 위탁 관리가 이루어졌다.
2.5. 2000년 1월 7일
1999년 말, KBO는 SK그룹을 끌어들여 쌍방울 인수건을 논의하였는데, 당시 쌍방울은 매각 대금으로 240억원을 희망했다. 이 때 프로야구단에 관심을 보인 SK그룹은 '''쌍방울과의 협상은 철저히 배제하고, KBO하고만 접촉하면서''' 레이더스 구단의 인수가 아닌 새로운 구단의 창단으로 프로야구에 뛰어들 계획을 갖는다.
당시 법정관리 중인 쌍방울 입장에서는 야구단을 넘기는 인수조건으로 최대한 많은 금액을 받아내길 원했지만, SK그룹은 조만간 '''자동적으로 퇴출되는 쌍방울과 굳이 접촉할 이유가 없었다.''' SK는 쌍방울이 자동으로 법정 퇴출되는 2000년 2월 12일까지 버티다가 신생팀을 창단하는 과정만 밟으면 된다는 의도였다. 양측 당사자 모두 팽팽하게 줄다리기 식으로 버티기만 한 끝에 쌍방울은 얼마 못 가서 GG를 치고, SK그룹은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SK가 프로야구에 참여할 것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게 된다.
이 시기 쌍방울을 살리기 위한 전북 도민들과 전북 출신 출향민들의 노력은 실로 눈물겨웠다. 서울과 전주에서 쌍방울 살리기 바자회가 열렸고 김수미를 비롯한 전라북도 출신 연예인들이 앞장서서 살리기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구단의 자금 사정은 이미 바자회 한두 번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처지에 놓여 있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결국 레이더스 소속 선수들은 전원 웨이버 공시되었고, '''창단 10주년을 불과 3개월 앞둔''' 2000년 1월 7일에 쌍방울은 해체되었다. 당시 SK는 어떻게든 서울 연고를 원했지만, KBO는 "서울 연고는 안 되니 수원에서 창단을 하든가, 쌍방울을 인수해서 전주에 머무르라"라는 입장이었었고, 쌍방울은 인수 대금으로 140억원이라도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SK가 인천으로 가면서 쌍방울을 직접 인수하는 일은 없었다.[49]
쌍방울에게 들어온 돈은 SK의 가입금에서 할애된 70억원의 위로금이 전부. 현대그룹이 400억원에 사겠다던[50] 야구단이 불과 몇 년만에 70억원 짜리가 되어버린 셈이다. 레이더스의 빈자리는 인천광역시를 연고지[51] 로 창단한 SK 와이번스가 채웠으며, 기존의 레이더스 선수단을 전원 인수했다.[52] 이에 따라 쌍방울 레이더스 법인은 청산절차를 밟아 2002년 12월 31일부로 폐업됐다.
한국 프로야구의 제 8구단의 역사는 이렇게 어느 구단에도 계승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KBO의 지원 속에 SK 와이번스는 리그의 일원으로 빠르게 자리 잡았으며 이렇게 쌍방울 레이더스는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쌍방울의 몰락 과정은 야구의 삼미, 청보, 태평양과 축구의 전북 버팔로, 농구의 나산, 골드뱅크, 코리아텐더 등과 함께 한국의 프로스포츠는 2008년 우리 히어로즈(현재 키움 히어로즈)가 창단되기 전까지 자생력이 없음을 확인시켜준 사례로서 교훈을 주었으며, '구단 해체 이후 창단'의 수순은 쌍방울의 기둥을 뽑아갔던 바로 그 구단에서 정확히 8년 뒤 재현된다. 과연 '''역사는 반복된다.''' 공교롭게도 두 구단의 해체일은 (2000년/2008년) 1월 7일로 똑같다.
이후 2021년, SK 와이번스의 모기업인 SK텔레콤이 야구단을 신세계그룹에 매각하면서 쌍방울의 해체 과정도 재조명 받았다. 다만 SK는 재정난으로 구단을 매각한 것이 아닌 기업 차원의 전략적인 이유로 야구단을 정리했고, 신세계그룹도 마찬가지 이유로 구단을 인수한 만큼 서로 제값을 주고받으며 정상적으로 구단이 거래되었다는 것이 쌍방울 때와 다른 점이었다. 야만없이지만 쌍방울도 구단을 적당히 유지할 정도의 재정만 되었어도 SK나 타 기업에게 제값을 받고 팔았을 수도 있지만 불안정한 시대 상황으로 인한 급박함이 팀의 해체를 불렀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53]
3. 쌍방울의 유산
3.1. 주요 기록
- 5년 연속 구단 피홈런 1위: 1991 ~ 1995년[54]
- 한 시즌 최다패 기록: 97패 (28승 7무)[55]
- 역대 최소관중 기록: 54명 (1999년 10월 7일 vs 현대, 전주구장)[56][57]
- 홈경기 최다 연승기록[58] : 17연승 (1996년 8월 14일 ~ 1997년 4월 13일)
- 한 시즌 최다 완봉승(영봉승 포함): 1996년 19회
- 한 시즌 최다 구원승: 1997년 44회[59]
3.2. 연고지
쌍방울 레이더스의 연고 지역이었던 전라북도 지역은 쌍방울이 창단할 당시에는 거의 연고 공백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프로야구 원년부터 쌍방울이 참가하기 전인 1989년까지 호남지역 연고는 해태 타이거즈에 할당되어 있었고 전주에서도 해태 홈경기가 분산 개최됐지만 엄연히 해태의 핵심 본거지는 광주광역시였고 전라북도는 비어있는 곳이나 다름없었다. 그 빈틈을 쌍방울이 차지하게 된 것.
쌍방울 레이더스 말년 때는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의 시설 노후화 문제로 군산시 월명 야구장에서 경기가 자주 열렸다. 그러던 것이 2000년부터는 월명 야구장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한 경기도 열리지 않았다가 2001년부터 2013년까지 KIA 타이거즈의 군산 경기가 다시 열렸다. 하지만 이후 2014년부터 기아의 홈구장이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로 바뀌면서 군산 경기는 중지되며, 군산상고와 전주고 선수들을 대상으로 1차 지명권을 갖게 된 NC 다이노스가 군산 홈경기를 유치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1차지명권 행사와 제2홈구장 경기는 엄연히 '''별개의 사안'''이기에 조용히 접었다.
쌍방울의 해체는 전북지역 아마야구에도 타격을 주었다. 군산상고와 전주고 모두 타 지역으로 전학하는 선수들이 속출하며[60] 야구부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다. 군산상고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낫지만 전주고는 아예 중학교 선수들이 전주고 야구부로 입학을 기피한 나머지 한동안 '''선수 부족으로 선수권 대회나 고교 리그에 참가조차 못할 정도'''로 심각한 흑역사를 보내야만 했다. 2010년대 들어 새로운 아마야구 팀들이 속속 창단하고 있지만 전북 지역은 정읍시와 고창군, 그것도 읍면 지역에 속한 학교에서만 창단했을 뿐[61] 정작 전주시, 군산시, 익산시에는 단 한 팀도 창단 소식이 없다.(익산시는 초중고팀이 전혀 없다.)
3.3. 선수
전주 시민들에게 남겨진 추억이나 좋은 기록이든 나쁜 기록이든 범접하기 어려운 기록들도 눈여겨 볼 만하지만, 쌍방울이 야구계에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역시 선수들일 것이다. 팀은 해체되었지만 돌격대에서 발굴(혹은 부활)한 선수들은 이적한 팀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며, 일부는 지도자로 변신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KBO 리그의 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
2011년 쌍방울 출신 선수는 김원형, 박경완, 오상민, 이진영 이렇게 4명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2011 시즌 초에 오상민은 도박사건으로 퇴출되어서 사실상 선수 생활이 끝났고 2011년 시즌을 끝으로 김원형은 은퇴했다.
2013년 10월 22일 박경완이 은퇴를 선언하고 2014년 4월 5일 한화와의 경기를 끝으로 은퇴를 하면서 마지막 쌍방울 선수는 이진영이 되었다. 군산상고를 졸업하고 1999년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한 이진영은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한 마지막 신인 선수다. 1999년 드래프트에서 이진영만 계약했고, 당시 모기업에 '''계약금으로 줄 돈도 부족하여''' 김성근 당시 감독이 일부 보조했다고 한다. 2018년 정규시즌이 끝난 뒤 10월 19일 이진영의 은퇴가 공식 기사화되어서 쌍방울에서 1년이라도 뛰었던 선수는 전원 추억 속으로 떠났다.
굳이 쌍방울에 지명되거나 연습생 시절을 거치고 현역으로 있는 선수를 찾자면 이대수(SK 연습생)가 있었는데 2018년 정규시즌 종료 시점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따라서 유일하게 박정권(2000지명, SK) 한 명만이 남아있었다. 박정권은 쌍방울의 지명은 받았으나 바로 동국대로 진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쌍방울의 지명권을 가져간 SK에 입단하게 되었다.[62]
결국 2019년을 끝으로 박정권도 은퇴하면서 이제 현역으로 뛰는 쌍방울 출신 선수는 '''없다.'''
4. 사건사고
5. 선수단
5.1. 선수단 목록
5.2. 등번호
5.3. 프랜차이즈
5.4. 2군
5.5. 주요 선수
[image]
불암갑이 그린 리즈시절 쌍방울의 스타 선수들
- 강길룡 - 1991~1993 쌍방울의 또다른 우완 선발투수. OB 베어스 트레이드 이전까지 쌍방울에서 2-3선발급 활약을 하던 선수였다. 그러나 OB 가서 항명사건에 연루되더니...[63]
- 김광림 - OB 베어스의 프랜차이즈 출신이었으나 1994년에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었고 1995년에 타격왕을 먹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1996년 미스터 올스타가 되기도 했으나, 1997 시즌 중 현대로 트레이드되어 1998년에 우승반지를 끼고 시즌 후 방출되어 다시 돌아왔다. 1999 시즌 후 은퇴. 은퇴 후 해설자로 마이크를 잡았다가 친정팀 두산 타격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2017년에 kt wiz의 타격코치를 지냈고 이후 분당구B 리틀야구단 감독으로 있다. 지도자로서의 평은 괜찮은 편이다.
- 김기덕 - 위의 김현욱, 성영재와 함께 또다른 잠수함 트로이카중 한 명. 사실 김현욱의 후덜덜한 포스에 가렸지, 쌍방울 노예의 시초는 김기덕이었다(...)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선발, 중간, 마무리 어디든 안 가리고 나와도 평균 이상은 뽑아내는 마당쇠. 2002 시즌 후 은퇴했다. 2020년 현재 한양대 감독.
- 김기태 - 돌격대의 형님이자 해결사. 왕방울. 쌍방울의 주장이자 팀을 대표했던 강타자. 이승엽 등장 전까지 좌타자 최다홈런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신인 최다홈런 기록도 그의 것이다. 또한 1997년에 .344의 타율로 타격왕까지 먹은 적이 있었다. 쌍방울 부도로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도 유일하게 버틴 선수였으나, 1999년에 김현욱과 함께 삼성에 팔려갔다가 2001년 말 김응용 감독과의 불화로 쌍방울 선수단을 계승한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되어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팀의 최고참으로 활약하며 2004년 지명타자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다. 은퇴 이후에는 지도자로 변신, LG 트윈스 감독을 맡아 팀을 10년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2015년에는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 부임하며 고향인 광주로 돌아왔고 2017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탄탄대로를 달리는가 했지만 각종 기행과 선수 기용에 대한 안팎의 불화 등이 겹치면서 2019년 불명예 퇴진했다. 그러나 선수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레전드임은 확실하고 레이더스에 있어서 최고의 스타이자 레전드라고 할 수 있다.
- 김원형 - 영원한 어린왕자, 돌격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에이스. 최연소 노히트 노런 기록 보유. 쌍방울 레이더스 선발투수관련 각종 통산기록 1위[64] 그 후 쌍방울 선수단을 이어받은 SK에서 활동하다가 2011년 은퇴, 통산 134승 144패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은퇴 후 SK, 롯데 코치를 거쳐 2020년 두산 베어스의 투수 코치로 활동중 SK 와이번스의 사령탑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지도자로서의 평은 보통.[65] 김기태, 조규제와 더불어 레이더스의 상징성을 가진 대표적인 세 선수로 꼽힌다.
- 김현욱 - 삼성 출신 선수로 1995년 쌍방울로 이적한 뒤 1997년 구원으로만 20승...을 따냈으나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는 이대진(17승), MVP는 이승엽(홈런 - 최다안타 - 타점)에게 빼앗겼다.[66] 1999년 친정 팀인 삼성에 팔려서 돌아갔다. 그리고, 삼성에서도 혹사당하다가(...) 2005년에 무릎 부상으로 35세에 은퇴했다. 은퇴 후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를 맡았다가 2018년부터 류중일 감독을 따라 LG 트레이너를 맡게 됐다.
- 박성기 - 초창기 쌍방울 암흑기 시절 좌완 에이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4년간 41승으로 이 기간동안 쌍방울 팀 내에서 박성기보다 더 많은 승수를 거둔 투수는 없었다.[67]
- 김호 - 수비형 유격수로 1991년은 .233 11홈런 22도루를 했다. 구단 해체 이후에는 해태, 두산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2018시즌까지 삼성 라이온즈의 주루코치였고 2019시즌 부터는 류중일 사단에 함류하여 LG 트윈스의 1군 수비코치를 맞는다.
- 박경완 - 포도대장. 돌격대의 안방마님. 크보 역사상 최고의 포수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레전드.
- 박노준 - 말이 필요 없는 선린상고의 독일병정. 1994년 .303에 43도루를 했다.
- 석수철 - 성균관대 시절 활약으로 국가대표에 뽑히고, 계약금 1억 5천에 1996년 1차지명으로 입단한 3루수. 첫 해의 나름 쏠쏠한 성적과 근성있는 모습으로 좋아하는 팬들이 많았다. 그러나 2년 차부터 고관절 부상으로 1군 경기에 아예 나오지 못하며, 결국 데뷔 첫 해 성적이 프로 마지막 성적이 되고 말았다. 현재는 성균관대 코치를 거쳐서 군산상고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
- 성영재 - 김기덕, 김현욱과 같이 잠수함 투수로 활약했던 투수, 선발로 나오던, 구원으로 나오던 든든한 투수였다. 그 뒤 쌍방울이 해체되고, SK가 창단되고도 SK에 남았지만 이호준의 트레이드 상대가 되어 해태로 이적했으며, 중간에 병역비리로 구속된 일이 있고 기아, 두산, LG를 떠돌아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현역 팀인 LG에서 은퇴하고 코치를 거쳐 LG의 프런트로 있다가 2017년 광주일고 야구부 감독을 맡았다.
- 심성보 - '맘보'라는 별명으로 큰 인기를 얻었던 좌타 외야수이자, 타선에서는 유일하게 김기태를 받쳐 주던 또 다른 강타자. 김성근 재임 시절 포텐이 터졌지만, 당뇨병으로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던 비운의 스타. 1998년 외야수 최다보살(20개)...한국판 원조 가르시아이자 '강견의 3심' 중 한 명. 나머지는 심재학, 심정수. 2020년 현재 천안북중학교 야구부 감독.
- 조규제 - 전주 특급. 쌍방울의 핵심 마무리. 킬인식의 감독초기시절 은근히 혹사당했다. 그 여파로 1995시즌에는 부상으로 사실상 개점휴업했고 그해 쌍방울은 초반 선두를 달리다가 역전패가 속출하며 최하위로 처졌다. 그 후에도 전주의 수호신으로써 잘 하다가 팀이 부도로 어렵던 시절 박경완과 함께 현대에 팔려갔다. 이후 2001년 SK로 재트레이드되어 2년간 있다가 2003년 현대, 2004년 KIA로 이적했고[68] 거기서 은퇴했다. 김기태와 함께 레이더스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다.
- 조용호 - 천안북일고 출신으로 빙그레에 있었다가 별 활약을 못하고 1991년 쌍방울로 트레이드 된 첫해에 .318의 좋은 타율로 활약을 했다.
- 조원우 - 돌격대장. 400경기 이상 무실책은 한국 최고 기록일 뿐더러 메이저리그 기록마저도 뛰어넘는다. 쌍방울 해체 이후 SK-한화에서도 뛰다가 은퇴 후 한화, 롯데, SK의 코치로 재직하다가 2016년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이 되었다. 2021 시즌에는 SK의 퓨쳐스 리그 감독으로 현장에 복귀.
- 최태원 - 철인. 1014경기 연속출장으로 KBO에서는 이 부문 1위. 다만 1014경기 연속경기 출장 기록 중 369경기는 쌍방울의 후신 격 팀인 SK 와이번스에서 소화했다. 쌍방울 유니폼을 입은 기간으로 국한하면 1995년 4월 16일 광주 해태전부터 1999년 10월 8일 전주 LG전까지 635경기 연속 출장. 물론 635경기 연속 출장도 단일 구단 소속 연속경기 출장 기록으로는 1위다.[69] 현재는 삼성 라이온즈의 1군 수석코치. 현재 지도자로써의 평가는 과거보다 굉장히 개선되어 호평을 받고 있는 중.
- 최한림 - 국내 최초의 좌완 사이드암.[70] 결국 김현욱을 상대로 트레이드 되어 삼성에서 은퇴한다. 은퇴 후 전라중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오래 있다가 2018년부터 인상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있다.
5.6.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지막 멤버들
- 투수 : 가내영(18) 고승환(48), 고형욱(41), 김경진(39), 김기덕(30), 김원형(16), 김유진(20), 박정현(21), 박주언(28), 박진석(1), 박창현(38), 성영재(17), 오상민(34), 유현승(11), 이광섭, 이병수, 윤형배(31), 정명수, 최승민(66), 최정환(24)
- 외야수 : 강민규(45), 김갑중(4), 김광림(33), 동봉철(32), 박재용(27), 심성보(35), 윤재국(8), 이계성(19), 이연수(37), 이진영(10), 장용대(50), 조원우(36)
5.7. 외국인 선수
- 제이크 비아노(Jacob Viano, 미국)
당시 쌍방울이 1라운드서 지명했던 선수다. 2만 달러에 영입되어 시범경기서는 나름 잘 던졌지만, 컨트롤 문제와 팀의 사정이 겹쳐 퇴출당했다. 28경기 3승 3패 7.06(중도퇴출)
- 마이클 앤더슨(Michael James Anderson, 미국)
2라운드서 지명된 LG 출신의 선수, 선발로 보직이 바뀌어 자신감을 드러냈으나, 최악의 팀 사정으로 인해 좋지 못한 성적을 내고 돌아갔다. 19경기 2승 9패 6.75. 1998년에는 외국인 선수를 들여오지 않았으며, 1999년에는 투수용병으로 이들을 영입했다. 다만 성적이 신통치 않아서 문제….
5.8. 그 외의 선수
- 정학원
내야수(유격수, 2루수). 정명원의 동생. 군산상업고등학교-원광대를 졸업하고 1990년 쌍방울 2차 1순위로 지명될 정도의 유망주였지만, 군 입대 후 복귀해서 성적이 별로여서 1995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현재 군산대학교 앞에서 식당을 운영중이다. 카운터 앞에 친형 정명원 KT코치와 선수시절 맞대결했던 신문기사와 군산상고 경남고 레전드매치때 기사가 붙어있기도. 가게 이름은 라이스 스토리.
- 강창남
재일교포 출신의 투수로 일본명은 코야마 마사오(小山昌男)다. 그 당시 강호였던 나라현의 덴리고교를 졸업하고 1981년에 긴테쓰 버펄로즈의 드래프트 2번으로 입단했다. 통산성적은 86경기 23승 21패 4.81의 방어율을 기록하고 1992년에 같은 재일교포인 긴테츠의 황태호와 같이 쌍방울에 입단했다. 그러나 찢어지게 가난한 구단 살림으로 인해 생겨난 식사와 숙소 문제를 도저히 인간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겠다며 시즌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계약을 어기고 돌연 일본으로 귀국하고 말았다. 쌍방울의 흑역사 선수 중에 하나.
- 류동효
태평양 돌핀스에서 이적, 쌍방울의 창단 멤버가 된 선수로 3루수가 주 포지션이었다. 선수생활 동안 특별한 성적은 남기지 못했으며 이후 롯데로 이적해 은퇴했다. 이말년이 딸아이 이름짓기 편에서 상품으로 내건 싸인볼이 이 분의 싸인볼이다. 이후 삼성 라이온즈 프런트에 합류했으며 2020년 기준 스카우터로 재직중이다.
- 황태호
위의 강창남과 같은 재일교포에 같은 긴테쓰 버펄로즈 출신의 투수이다. 일본명은 히야마 야스히로(檜山泰浩)다. 후쿠오카현 도스쿠고교 출신으로 1985년에 긴테쓰 버펄로즈 드래프트 1번으로 입단했는데, 그 당시 PL학원고등학교의 듀오였던 키요하라 카즈히로, 구와타 마스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특급 유망주였다. 그 이후 미국으로 연수를 가서 루키리그에서 29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1군에서 뛴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긴테츠에서는 흑역사 취급당하고 있다.
어쨌든 1992년에 강창남과 같이 재일교포로서 입단하게 되지만 강창남은 시즌을 한 번도 못 뛰고 먹튀를 한 반면 황태호는 1경기 무승 무패 81.00의 기록만 달랑 남기고 6월에 퇴단하고 말았다. 일본으로 귀국한 후 운동선수 출신으로는 아주 드물게 법무사 시험에 패스, 현재는 와세다세미나 전임강사로 야구선수 때보다 더 유명세를 타고 있다. 관련 일본 기사
어쨌든 1992년에 강창남과 같이 재일교포로서 입단하게 되지만 강창남은 시즌을 한 번도 못 뛰고 먹튀를 한 반면 황태호는 1경기 무승 무패 81.00의 기록만 달랑 남기고 6월에 퇴단하고 말았다. 일본으로 귀국한 후 운동선수 출신으로는 아주 드물게 법무사 시험에 패스, 현재는 와세다세미나 전임강사로 야구선수 때보다 더 유명세를 타고 있다. 관련 일본 기사
6. 유니폼
7. 후일담
- 음원으로 남겨진 구단 정식 응원가가 없었던 팀이다. 동시대에 있던 다른 팀들은 구단 차원에서 제작한 응원가가 한 개 이상이라도 있었지만 무슨 사연 때문인지 쌍방울은 응원가가 따로 없었다. 다만 팬들이 관중석에서 부르던 응원가는 따로 있었는데 "방울 방울 방울 방울~ 쌍방울~ 쌍방울~"[72] 과 "힘내라 힘"이 있었고 호남 연고의 구단답게 남행열차를 지역 연고 응원가로 쓰던 시절도 있었다.
- 구단 해체 이후 마스코트 방울이 인형탈은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에 버려져 있다. 사진 보기 이 사진은 2006년 3월 26일 어느 야구 팬이 전주구장을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하여 촬영한 사진이다. 언뜻 보면 진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 같기도 해서 괜히 소름끼치기도 하다. 이 사진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3집 앨범커버에 사용되었는데, 해당 포스팅에는 이미 고인이 된 달빛요정의 사진 사용 문의 댓글이 가장 먼저 달려 있어 더욱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쌍방울이 SK 와이번스로 재창단 되고 21년 후, 야구단이 신세계로 넘어간 이후 마스코트 또한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 레이더스를 대신하여 창단한 SK 와이번스는 당초 연고지로 서울을 원했으나, 현대 유니콘스 측이 중간에 끼어드는 바람에 연고권을 54억 원에 구매하고 인천으로 입성했다. 이후 쌍방울 선수로 구성된 팀이란 이미지를 지우는 것을 최대 과제로 삼으며 '인천 SK' 문구의 강조, 김경기 등 인천 출신 스타 선수 영입, 2002년 삼미 슈퍼스타즈 올드 유니폼 행사 등 메모리얼 이벤트를 하며 새 연고지인 인천에 정착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보여줬다[73] . SK 와이번스 창단 당시에는 쌍방울 팬덤에서 넘어온 사람들과 인천에서 새로이 팬이 된 사람들이 섞여 있었는데, 이러한 구단 분위기 속에서 옛 쌍방울 팬들은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 기존 인천팬 외에 타 팀 팬들한테까지 집단적으로 배척을 당하면서[74] 팀에 이어 팬들까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75] 그래서 이 당시 소수의 쌍방울 골수 팬들이나 타 팀 팬들에게 배척당한 팬들은 KIA 타이거즈로 팬고이전하거나[76] , 지역내 다른 스포츠팀들인 전북 현대, 2001년부터 들어선 전주 KCC로 갈아탔다. 또한 이 때 왕따를 당했던 기억 때문에 아직도 자신들을 외면한 SK, 이웃인 KIA, 쌍방울의 주축 선수들을 대거 영입해 몰락을 앞당긴 현대(이후 히어로즈로 재창단)와 삼성 등의 타팀들을 원망하는 분위기가 전주 야구팬 정서에 많이 남아있다.
- 요즘 야구팬들 사이에서 쌍방울은 SK 와이번스의 정통성을 흠집내려는 핑계 내지는 옛 추억을 되살리기 위한 소재로 가끔 언급되는 것이 전부이지만, 아직도 이들을 그리워하는 이들은 많은 것 같다. 실제로 1,700명 가까운 회원이 모인 레이더스 팬클럽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2011년 7월 14일에 방송된 KBS 1TV 세상사는 이야기에서는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지막 팬클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2012년 제10구단 관련 유치전이 벌어졌을 때도 옛 쌍방울을 기억하는 많은 시민들이 호응하여, 아직 전주에 남겨진 돌격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KBO에서 10구단 창단 주체로 수원-KT의 손을 들어주면서 돌격대의 부활은 다시금 요원한 일이 되었다. 쌍방울 출신인 김기태 감독이 KIA에 부임한 이후 챔피언스 필드에 가끔씩 김기태 마킹을 한 쌍방울 유니폼을 입은 아재들이 보인다.
[image]
-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스코트였던 방울이는 1980년부터 1991년까지[77]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공식 마스코트였던 "배트에 탄 소년(バットに乗った少年)"의 표절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닮았다. 사실 야구공 머리의 인간형 마스코트는 1960년대부터 미스터 멧이나 미스터 레드 같은 사례가 메이저리그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요미우리 마스코트 역시 완전한 오리지널 창작 캐릭터라고는 할 수 없다.
- 익산-안산 출신의 만화가 이말년[78] 과 전주 출신의 래퍼 데프콘이 쌍방울 레이더스의 팬이였다. 특히 이말년은 같은 안산시 출신 선수 김광현 덕에 와이번스로 갈아탔지만, 마구마구에서 쌍방울 올스타를 한다던지 트위터 등을 보면 과거 쌍방울에 대한 향수도 아직까지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데프콘 또한 1박 2일 방송 중에 이제는 SK 팬임을 인증하였다. 그 밖에 부안군 출신의 스트리머 셀옹도 쌍방울 팬이였다. 온게임넷 방송 출연 당시에 쌍방울 유니폼을 입고 나왔었다. 쌍방울이 해체된 현재는 한화 이글스를 응원하고 있다고 한다.
- 올스타전에는 동군 소속으로 참가했다. 사실 위치로만 따지면 서군으로 들어가는 게 타당하지만, 제7구단인 한화 이글스가 1군에 참가했을 때 팀간 전력 안배 차원에서 서군에 들어가는 바람에 쌍방울은 한 팀이 모자란 동군의 빈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SK 와이번스가 인천을 연고로 하고 있음에도 서군이 아닌 동군에 들어간 것도 바로 이런 사정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자레코사의 슈퍼 3D 베이스볼을 현대전자에서 현지화한 한국프로야구 게임에는 이게 제대로 반영이 안 되어 있어서 쌍방울이 서군으로(그 대신 한화는 동군으로) 나온다.
- 같은 전라권 야구단 해태 타이거즈 팬들에게는 아쉬움의 대상이다. 쌍방울이 창단되면서 신생팀 프리미엄으로 본래 연고지인 전남은 물론, 과거 해태왕조의 주축을 담당한 선수들을 대거 배출한 전북쪽 선수들이 대거 쌍방울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김기태, 박경완, 조규제, 성영재, 김원형, 이진영, 정대현 등 본래 해태 연고지 내에서 우수한 선수들이 꾸준히 배출됐고, 비슷한 시기 연고지의 박재홍도 해태의 지명을 거부한 사례가 있어 해태팬들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셔야했다. 더욱이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던 해태 말년에 왕조의 몰락과 전력의 약화를 고스란히 실감했던 시기에 더더욱 그랬다. 전통적으로 좌타거포와 포수의 부재를 안던 해태에 "쌍방울이 창단되지 않고 그 선수들이 그대로 왔다면?"은 여전히 야구팬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논쟁 거리. 기존의 이종범, 홍현우, 장성호, 이호준과 김기태, 박경완 등이 타선에 합류하고, 투수진도 김원형, 조규제가 가세했다면 2000년 현대가 차지했던 위용을 해태가 그대로 흡수해 1980년대 이상의 지배적인 강팀으로 군림했을 가능성이 크다.
- 소속 선수들은 쌍방울이 군기가 꽤 엄격한 팀이었다고 회고했다.
- 최해식은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외야 플라이를 쳤는데 자신도 모르게 코치에게 인상을 썼다는 이유로 해당 코치에게 발로 얼굴을 맞았다고 증언했다.
- 심성보의 말에 따르면, 당시 쌍방울은 해태 타이거즈 다음으로 선후배 관계가 엄격했다고 한다. 그 이유로 "초창기 쌍방울엔 해태 출신 선배들이 많았으며, 해태 때 ‘매’로 후배들의 기강을 잡던 분들이 쌍방울이라고 조용히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보단 은퇴를 앞둔 노장 선배들이 이 팀 저 팀에서 온 게 군기가 세진 가장 큰 배경이었다."라는 말을 했다. 오죽했으면 “고등학교 팀인 줄 알았다. 실제로 주변에서 ‘쌍방울 고등학교’라고 불렀을 정도.”고 덧붙였다.
-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한 오상민도 '쌍방울은 선배님들이 워낙 많다보니 어린 선수들은 숨조차 쉬기 어려운 분위기'였다고 술회했다. 선발투수 지명을 받고 트레이너실에서 마사지를 받다가 지나가던 선배님한테 머리를 정말 많이 맞았고, 휴식시간에도 신참선수들은 헬스장 벤치프레스 의자에서 쉬었다고 했다.
8. 역대 성적
8.1. 역대 포스트시즌 상대 전적
[1] 제2 홈구장[2] 창단 당시 구단주였던 이봉녕 쌍방울 창업주의 아들이다.[3] 1999년 올스타전 이후 김성근 감독의 해임으로 감독 대행을 맡아 시즌을 마무리했다. 2000 시즌 감독으로 내정되었으나, 구단의 해체 후 SK 수석코치가 되어 1시즌을 보내고 해임된다.[4] 경기 당 평균 4,221명[5] KBO 역사상 가장 적은 연간 관중 수[6] 경기 당 평균 757명[7] 옛 마산 지역에 연고가 있었던 기업. 현재 창원 NC 파크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가 과거 이 회사의 공장 부지였다.[8] 창업주가 정읍시 출신으로 전라북도에만 2개의 공장을 가동하는 등 현재도 전북과 인연이 깊은 기업이다.[9] 익산시를 기반으로 성장한 기업으로, 오래 전부터 전북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그 속옷 회사 맞다. 지금도 익산시에 공장이 있다.[10] 해태와 호남이 격렬하게 반대했던 것과 달리 또다른 유력한 후보지였던 마산에 대해서는 롯데그룹이나 부산-경남의 지역 민심의 반발이 별로 크지 않았다. #[11] 현실에서 지역감정을 찾아보기 힘든 2020년 시점에서는 이게 뭔 개소리냐 할 일이지만 당시는 군사정권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었고, 민주화 세력도 지역 맹주에 따라 둘로 갈라지는 등 영호남 지역감정이 가장 최고조에 달했던 시절이다. 그래서 정치와는 별 상관없는 사소한 것으로도 영남과 호남이 서로를 물어뜯기 바빴고, 이는 비단 정치권뿐만이 아닌 일반 시민들에게조차 해당되던 일이었다.[12] 사실 생각해보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주장인게, 당시 영남 지방에도 롯데 자이언츠와 삼성 라이온즈의 2개 구단이 있었다. 그 전에는 MBC 청룡이 LG 트윈스로 바뀌었을 때 왜 영남 출신 기업이 프로야구에 또 뛰어드냐는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다. LG그룹도 창업주가 경남 진주 출신이고 부산에서 시작한 기업이기 때문.[13]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창단에 산파 역할을 하며 군산시 야구의 대부로 자리매김했고 한국프로야구 출범 과정에서 매우 큰 역할을 차지했던 인물. 훗날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 대행을 맡았으며, 프로야구 제10구단 관련 논란 때도 전라북도-부영그룹 쪽을 대변했다.[14] 이산(而山) 이봉녕 쌍방울 창업주의 맏아들. 1997년에 아버지로부터 경영권을 이어받아 쌍방울그룹 회장을 맡기도 했다.[15] 당시 창단식은 전주문화방송에서 생중계했는데 2019년 4월에 전주문화방송 측이 이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했다. 쌍방울 구단의 초창기에 대한 영상자료가 부족한 상황을 감안할 때 상당한 가치가 있는 영상이다. 화질부터 보면 최상급이다.[16] 1993년 4월 10일 삼성 라이온즈가 쌍방울과의 경기에서 17-0으로 개막전 최다 점수차 완봉승 기록을 깼다.[17] 지금도 전북의 고교야구팀 갯수는 적다.[18] 당시 해태 타이거즈는 1986~1989년 4년 연속 우승을 이룬 강팀이었다.[19] 쌍방울야구단 교통사고 2명 사망[백지연],MBC뉴스,1990-06-21[20] 결국 방극천은 4년 동안 2경기 등판, 3.2이닝 1탈삼진, 그것도 현역 마지막 시즌인 1995년에야 달성한 안습한 기록만 남기고 은퇴한다.[21] 후술하겠지만, 먼 훗날인 2010년대 중반 이 사실이 밝혀지자, 이 사례는 김성근의 '''부자 구단에 맞서는 가난한 지도자''' 이미지가 말도 안되는 허상이라는 것이란 주장의 증거로 많이 거론된다.[22] 불과 몇 년 전에 이광환 감독의 LG 트윈스가 추구한 자율야구가 혁신으로 받아들였을 정도였다.[23] 현 양주 레볼루션 감독.[24] 스탯티즈 기준.[25] 김성근 감독은 부임하면서 상대 팀의 장타를 억제하기 위해 홈 구장의 외야 담장을 2.1m 펜스 위에 3.7m 철망을 얹으면서 높였다. 그 결과 쌍방울 타자들도 홈런을 치지 못했지만, 투수들도 9이닝당 피홈런율이 0.51일 정도로 홈런을 맞지 않았다.[26] 후술하겠지만 이는 현재도 논란이 많다.[27] 타격왕, 출루율왕, 장타율왕. 세 타이틀을 한 시즌에 동시에 딴 타자는 1993년 양준혁, 1997년 김기태, 2010년 이대호, 2019년 양의지 4명밖에 없다.[28] 타자 총합 WAR이 해태는 27.63, 쌍방울은 27.61로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백인천 감독의 리빌딩이 성공한 38.92의 1위 삼성 라이온즈와는 꽤 차이가 났다.[29] 사실 이 당시에 해태는 공격에서 홍현우와 이종범 의존도가 굉장히 심했다. 장성호와 이호준 등 신예들의 포텐이 터진 건 해태가 하위권으로 몰락하기 시작한 1998년 이후의 일이니...[30] 10승 5패를 기록했던 성영재와 김원형은 이 때 구원투수인 김현욱, 조규제, 김기덕, 오봉옥 등에게 갈취당한 승수가 많았다. 안습.[31] 이는 살려조 이전의 김성근 투수 혹사의 사례로 가장 유명하다. 당연히 선발을 조기 강판하고 남은 5이닝 이하의 이닝을 김현욱을 던지게 하며 만들어진 기록인지라 다승왕이 되고도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데 실패했다.[32] 김성근 감독의 가난한 언더독 이미지와는 달리 그가 이끄는 구단은 2016 시즌까지 5차례나 페이롤 1위를 달성한 적이 있다. 그 중 한 시즌이 바로 97 쌍방울.[33] 다만 직접적인 원인은 모기업이 무주 동계 올림픽을 유치하겠다며 무주 리조트를 건설하는 등 무리한 사업 확장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이었다.[34] 이때 만든 시설을 가지고 무주군에 동계 올림픽을 유치하자는 포부가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유치는 강원도 평창군으로 넘어간다.[35] 1997년 시즌 중 현대로 트레이드되었다가 1998년 시즌 후 자유계약 선수로 풀린 뒤 쌍방울에 복귀. 1999년 시즌 후 은퇴했다.[36] 키움 히어로즈의 초창기 때 야구 관계자들은 물론 팬들이 심히 걱정했던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다만 키움(구 넥센)은 구단주가 KBO 희대의 딜러 이기도 하거니와, 모기업이 따로 없는 구조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능력껏 스폰서를 물어와서 부족한 재정을 채울 수 있기 때문. 물가 변동을 감안한다 해도 현재 히어로즈가 키움증권으로부터 받는 네이밍 스폰 금액이 당시 쌍방울의 자본금에 필적하는 판이다. [37] 단, 선수단 자체가 구단의 월급으로 운영되는 상황에서, 선수는 구단의 재산이나 마찬가지이고, 구단이 선수단 구성에 대해서 감독에게 간섭받을 이유는 없다. 물론, 이러한 선수들을 가지고 경기를 운용하는 것이 감독인 만큼, 감독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도 맞다.[38] 그렇지만 히어로즈 구단이 리그의 규칙을 어기고 KBO에 신고하지 않은 채 여러 현금 트레이드를 한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이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39] 당시 신문 기사,경향신문,1999-04-22[40] 당시는 외국인 선수 선발 제도가 트라이아웃 제도였기 때문에 영입은 일단 할 수가 있었다.[41] 1999년 당시 전주시의 교통 인프라는 꽤 열악한 편이었다. 광주나 대전과의 접근성은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괜찮았지만 대구나 부산 방면의 고속도로가 매우 미비했던 것. 특히 대구 원정을 갔을 때는 당시에는 새만금포항고속도로도 없던 시절이라 최소 거창까지 국도나 지방도를 타고 뱅뱅 돌아간 뒤 선형 개량이 되지 않았던 2차선짜리 88올림픽고속도로를 타고 대구까지 가야 했을 정도로 교통편이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해태나 한화 원정 경기는 상대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전주에서 당일치기 이동으로 어떻게 때웠지만 이 두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방면으로의 원정길은 엄청 멀었다.(서울, 부산 3시간, 대구 4시간, 인천 4시간) 선수단은 원정 때마다 45인승 일반버스로 몇 시간씩이나 소모하며 먼 길을 돌아가야 했으며 이는 쌍방울의 '''숨겨진 전력 약화 요인'''이기도 했다.[42] 이 중 운행했던 쌍방울 구단 버스가 1991년식 AM939였으며, 2000년 쌍방울 구단 해체 후 대구의 협성고등학교 축구부 버스로 활동하다가 2007년에 폐차되었다.[43] 시합이 끝나고 이동할 때 선수들의 피로는 말도 못 했다고 한다. 이 증언은 KBS N Sports의 한국 프로야구 레전드 10인 김기태 편과 박동희 기자가 작성했던 칼럼인 쌍방울 위클리의 심성보의 증언과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다.[44] 그나마도 계약금을 구단에서 다 줄 수 없어서 김성근이 일부 보조해야 했다. 대학으로 보낸 선수들 중 뒤에 지명권을 인계받은 SK에 입단한 선수는 4명(최경철, 김형철, 이영욱, 한상준) 뿐이었다.[45] 이 무릎 부상은 이후 조원우의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며 은퇴 시까지 고질적으로 따라다니게 되었다.[46] 기간으로만 치면 한 달 이상을 꾸준히 졌다고 볼 수 있지만 이 당시는 9월 중순부터 우천취소 재편성 일정을 소화했기에 띄엄띄엄 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당시 쌍방울은 띄엄띄엄 편성된 스케줄에서도 승리를 챙기지 못할 정도로 팀 전력이 주저앉아버린 상태였다. 결국 10월 8일 전주 LG전에서(실제 경기는 10월 8일에 열렸지만 공식 기록으로는 10월 6일 경기로 표기한다. 자세한 사정은 아래에 후술.) 7:5 승리를 거두면서 긴 연패의 사슬을 벗어나게 됐다. 하지만 17연패 후 승리를 거둔 그 경기는 쌍방울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달고 치른 마지막 경기가 됐고 이듬해 해체되고 만다. 그리고 이날 이후 2024-10-16 14:14:16 현재까지 전주시에서는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지 않고 있다.[47] 17연패는 KBO 리그 단일 구단 최다 연속 패배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21세기 들어서는 누구도 이 기록에 쉽게 범접할 수 없으리라 생각됐지만 한화 이글스가 2020년 5월 23일부터 17연패를 찍고 말았다.[48] 이 패배수는 비밀번호의 행진을 하고 있던 롯데의 2002년 시즌 패배수와 동일하다.[49] 이런 행보는 훗날 같은 과정으로 창단된 구단의 역린이 되였다. 해체 후 재창단 과정을 거친 두 구단이 모두 이전 팀의 족보를 물려받지 않은 상태에서 연고지만 갈라졌기 때문. SK가 쌍방울 해체 후 연고지를 옮겨 재창단 형식을 취함에 따라 쌍방울의 역사가 끊겼듯이 같은 방식으로 창단된 히어로즈가 삼청태현의 족보를 물려받았다고 주장할 수 없어졌다.[50] 1993년, 현대그룹은 프로야구 참여를 위해 레이더스 인수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51] 이 때 현대가 인천을 떠나서 수원 야구장에서 8년간 머물렀다.[52] 비슷하게 현대 유니콘스의 선수단과 프런트를 센테니얼이 인수하여 히어로즈로 재창단했다. 다만 둘의 차이라면 SK는 쌍방울이 법정 퇴출될 때까지 기다렸지만, 센테니얼(히어로즈 모기업)의 경우는 KBO와 처음부터 해체 후 재창단 방식을 전제로 현대 매각을 진행했다.[53] 2021년 기준 재정난을 겪고 있는 두산그룹의 경우 다른 계열사를 다 팔면서도 베어스만큼은 결단코 팔지 않았다. 특히 신세계그룹이 두산에게 먼저 접근했을 정도로 매각이 유력했음에도 오히려 팔지 않았다. 이 선택이 이후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모르지만, 일단 두산은 절대 야구단만큼은 팔지 않겠다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54] 한술 더 떠서 1992년에는 140피홈런, 1999년에는 187피홈런으로 한 시즌 최다 피홈런 기록도 갈아치운 전력이 있다. 이 기록은 다음해에 이 팀을 대신하여 창단된 SK가 195개란 다시 나오기 힘들 기록으로 경신했다.[55] 2002년에 롯데가 타이기록을 세웠다.[56] 쌍방울이 치른 1999년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홈 4연전 중 세 번째 경기. 이날 쌍방울은 2-3으로 패했는데 이 패배로 1995년 이상훈 이후 4년 만에 정민태가 단일시즌 선발투수 20승 기록을 세웠다. 참고로 코로나19로 인한 무관중 경기를 제외하고 KBO 리그 역사상 한 경기 100명 이하의 관중이 들어온 적은 총 네 번이다.[57] 이전 버전에서는 이날 패배로 1985년 삼미 이후 14년 만에 18연패 기록이 등장했다고 나오지만 실제 기록으로는 17연패-1승-1패가 맞다. 쌍방울은 1999년 10월 8일 전주구장에서 LG와 경기를 치렀고 이날 7:5로 승리를 거뒀는데 이 경기는 10월 6일에 치렀어야 할 더블헤더 2차전의 재경기였다. 10월 6일 대낮에 열린 1차전 개최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저녁 시간대에 편성된 2차전이 시작되자마자 전주구장의 낡은 조명탑이 고장나고 말았다. 그래서 이 경기를 서스펜디드 게임으로 처리했는데 LG가 다음 날인 10월 7일 잠실에서 롯데와 경기를 치르기로 돼 있어서 LG를 서울로 보낸 뒤 10월 8일 다시 전주로 오게 해 재경기를 연 것이다. 그래서 단적으로 보면 쌍방울이 18경기를 내리 지고 마지막 경기를 이긴 것으로 보이지만 공식 기록으로는 17연패 이후 1승을 거두며 연패를 끊었고 그 뒤의 마지막 경기인 현대전을 졌다고 보는 것이 맞다.[58] 재밌는 점은 이 기록이 원정팀들이 묵었던 전주 코아호텔의 귀신 목격담과도 관련있다는 것이다. 쌍방울 홈 17연승의 비밀 문서 참조. 당시 쌍방울을 맡았던 김성근 감독은 SK의 감독을 맡던 2009년 시즌 막판과 2010년 시즌 초에도 22연승 기록을 달성한 적이 있다.[59] 이 해에 쌍방울 불펜의 핵심이던 김현욱이 구원승으로만 20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했다.[60]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태어난 KBO 리그 선수 중에서 전북에서 태어났지만 타 지역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와 타 지역 연고팀의 지명 선수로 입단한 사례가 꽤 있는데 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시점 내지는 고학년이던 시절 쌍방울이 해체되고 도시연고제 전환으로 광주 연고팀으로 한정된 해태의 우선지명도 어려워지면서 서울 등 수도권 학교로 전학을 간 이들이 많다. 대표적 사례가 군산 태생의 오지환과 전주 태생의 강지광.[61] 정읍이평중학교, 정읍인상고, 고창영선고 등 3개교가 야구부 창단을 했으나 전라북도교육청과의 갈등으로 고창영선고는 2019년을 끝으로 해체되었다.[62] 참고로 당시 동국대 야구부 감독은 말년을 쌍방울에서 보냈던 한대화.[63] 은퇴 후 경기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로 부임했으며 곽연수 감독의 퇴임 후 감독으로 승진했다. 현재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64] 통산 최다승(70승), 최다패(73패), 최다이닝, 최다완투, 최다완봉, 최다 탈삼진 등등 여러 기록보유.[65] 2군 코치 시절 육성 쪽에서는 괜찮은 평을 들었으나 1군 투수 코치를 맡은 뒤에는 투수 교체 타이밍 쪽에서는 평가가 나쁜 편. 2021 시즌은 한 팀을 이끄는 감독의 포지션이 되었으니 책임이 막중하다.[66] 만들어진 기록에는 상을 줄 수 없다는 기자들 사이의 불문율에 의한 것이었다.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에 대해서 기자들은 기록은 영원해도 상은 영원히 없다라고 맞불을 놓았다.[67] 이후 2년간 다소 폼이 떨어지긴 했지만 초창기 벌어들인 승수 덕택에 1996년까지는 팀 내 유일 통산 50승 이상 투수였다. 이후 김원형이 50승 돌파와 함께 꾸준한 활약으로 팀내 선발투수 관련 모든 기록 1위로 올라간다.[68] 2001년 조웅천과 함께 당시 신생팀이었던 SK의 전력 보강 목적으로 현금 트레이드로 이적했으나 2003 시즌을 앞두고 FA 박경완의 보상 선수로 현대 유니콘스에 돌아와 그해 우승 반지를 하나 더 끼고 KIA로 이적했다.[69] 2위는 OB 베어스에서 뛰었던 김형석의 622경기, 현역 중 1위는 500+ 경기를 연속 출전한 황재균.[70] 사이드암 투수 자체가 우완일 경우 우타자에 강하기 때문에 기용되는데, 좌완 사이드 암은 우타자에게 약하다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71] 선수은퇴후 삼성 라이온즈의 불펜포수로 취직했다가 현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불펜포수로 재직중[72] 축구 응원가로 잘 알려진 Ole Ole Ole 노래의 음정이다.[73] 이는 동시에 현대의 인적 승계팀인 히어로즈와의 마찰을 일으켰다. 2008년 SK 와이번스가 태평양데이 행사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벌이면서 이 논란은 더욱 커졌다.[74] 인천 팬들은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 이전과 새로 생긴 SK 와이번스의 정착 때문에 혼란스러워서 옛 쌍방울 팬들까지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타 팀 팬들이야 자신들과 무관한 옛 구단의 팬들과 친할 이유가 더욱 없었고.[75] 한편 현대 유니콘스 해체 이후 재창단한 히어로즈 역시 처음에는 현대 색을 지우고 선을 그으려고 했었다. 이에 맞춰 현대 출신 고액연봉 베테랑들을 트레이드하려고 시도했고 현대 시절 마지막 감독인 김시진이 아닌 이광환을 감독으로 선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트레이드는 실패했고 이광환 체제는 안정적이지 않았으며 이러한 현대 외면은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구 현대 팬들을 흡수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으며 처참한 인기와 관중 동원애 그친다. 여기에 SK와의 정통성 경쟁 문제도 있었던 탓에 2009년부터는 전략을 바꿔 자신들의 전신격 팀인 현대 유니콘스와 과거 인천 연고 구단 시절의 팬들을 끌어안으려 애쓰게 된다.[76] 여기서도 오랜 기간동안 광주 팬들에게 경멸과 왕따를 당하며 살아야 했다. "니네 팀은 어디갔냐?", "그냥 야구팬 관두지 그랬냐? 우린 니네들 필요 없어."란 말을 듣는 건 흔한 일.[77] 1992년부터는 '자빗' 이라는 토끼를 사용한다.[78] 태어난 곳은 익산이지만 실제 성장한 곳은 안산이라고 한다.